[칼럼 54] 연산군 언문 탄압의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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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54]
연산군 언문 탄압의 전모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생애와 정치적 활동은 다양한 사건과 변화로 가득한 역사적 여정을 걸어갔다.
1476년 11월 7일, 조선 9대 왕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연산군의 어머니는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한 윤씨였다. 나이 어린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어 학문적 소양을 키워나갔고, 1494년에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재위 기간은 1494년부터 1506년까지 12년간이었다.
연산군의 재위 4년 되던 무오년 1498년에는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이 일어났다. 무오사화로 인해 연산군은 국왕으로서의 권력을 강화하였고, 이를 통해 사치와 사냥을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폐비 윤씨 문제와 후궁들을 죽이는 악행 그리고 조모 인수대비 구타로 죽음을 초래하며 갑자사화를 발생시킨다.
이후 연산군은 학문을 중단하고 경연(經筵)을 폐지하더니 급기야 사간원(司諫院) 마저 폐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하면서 황음(荒淫)에 빠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와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아 왕권을 남용했다.
이렇게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1504년 7월 19일 도성에는 그의 악행을 비방하는 벽서가 붙는 투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 크게 노한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한 벽서가 언문으로 쓰였다는 이유에서 언문으로 쓰인 책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과 함께 ‘언문 금지령’을 내린다.
전교하기를, “어제 예궐(詣闕)하였던 정부(政府) · 금부(禁府)의 당상(堂上)을 부르라. 또 앞으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주라. 어제 죄인을 잡는 절목(節目)을 성 안에는 이미 통유(通諭)하였거니와, 성 밖 및 외방에도 통유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1504) 7월 20일>
전교하기를, “언문을 쓰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알고도 고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論斷)하고, 조사(朝士)의 집에 있는 언문으로 구결(口訣)을 단 책은 다 불사르되, 한어(漢語)를 언문으로 번역한 따위는 금하지 말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22일>
언문 금지령에는 언문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말고, 이미 배운 자들도 언문을 쓰지 말라는 것과 함께 언문을 아는 자들을 관청에 고발하고, 언문을 아는 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그 이웃까지 처벌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기사 때문에 흔히 연산군 치세 내내 언문이 사용되지 못하고, 연산군은 언문을 탄압한 폭군으로만 인식하게 되었지만, 연산군의 언문 탄압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왜냐면 언문 금지령은 사실상 비방 벽보를 쓴 범인을 잡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언문을 아는 사람들의 글씨와 벽서에 쓰인 글씨체를 대조해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벽서를 쓴 범인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연산군은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연산군 시절의 궁궐 기생 ‘흥청’의 음악 교본이나 달력 등을 언문으로 번역해 사용하게 했으며, 언문을 아는 사람을 뽑아 관리로 채용하는 등 폐위 전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언문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연산군의 치세는 조선 조 개국 100년의 중요한 시대를 반영하며, 사화(士禍)로 인한 유혈극과 붕당(朋黨)의 형성을 주도했다. 그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었으며, 임진, 병자 등의 국난으로 국운이 쇠퇴하게 되었지만 연산군은 폐위 당하기 3개월 전까지 꾸준히 언문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연산군은 언문을 싫어하여 탄압한 것이 아니라, 당시 투서를 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으니, 적어도 연산군이 언문을 탄압했다는 오류는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
1443년 창제된 훈민정음은 현재 ‘세계 최고의 표음문자’라는 칭송을 받고 있지만, 양반들은 언문을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의 ‘암글’이라 부르며 비하했고, 세종대왕의 후손으로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산군’에 의해서 언문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하는 등 훈민정음이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2024년 현재의 우리는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가 아닌 스물넉 자를 한글이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