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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여민관

훈민정음 경산 칼럼

[칼럼 57]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에 숨겨진 이야기

관리자 | 조회 111

 

[칼럼 57]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에 숨겨진 이야기

 

196212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한 권의 책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를 해 본다.

 

해례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의 다섯 가지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진 원리와 사용법에 대한 해설과 용자례를 통해서 정음의 활용 방법 등에 대한 예시를 기록해 놓은 책으로 가로 20, 세로 32.3크기이다. 표지 2장에 본문 3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표지와 첫 두 엽(종이 따위를 세는 단위)은 없어진 것을 훗날 보충한 것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문자를 통틀어 문자에 대한 해설서가 있는 글자 훈민정음은 유일성과 영향력에서 유일하며 대체 불가능하여 유물의 손실 또는 훼손이 인류 유산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고, 일정 기간 동안 세계의 특정 문화권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자료로 유네스코 등재 기준에 적합하므로 지정한다고 밝힌 자랑스러운 인류문화유산이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 2차 반포 후 494년 동안 꼭꼭 숨어있다가 19405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서 출현 과정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건국대 박종덕 교수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란 주제를 2006년 발표하기 전까지 세간에서는 19408월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 진성 이씨 이한걸(1880~1951) 집에서 세전가보(世傳家寶)로 전해온 것을 이용준(1916~?·월북)이 훔쳐서 간송 전형필에게 팔아넘긴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박종덕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을 살펴본다.

세종대왕이 강화 도호부사로 재직하였던 김수에게 백성 훈육용으로 내린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전가보로 보관하고 있었던 긍구당(肯構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 있는 광산 김씨 종택인데, 1933년 같은 안동지역의 이한걸의 셋째 아들인 16살의 이용준을 두 살 어린 김응수(1880~1957)의 셋째 딸 김남이와 혼인하게 하여 사위로 맞이한다.

 

장인이 된 긍구당 주인 김응수는 당시 성균관대 전신인 경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 사위인 이용준을 매우 아껴, 사위가 긍구당에 올 때마다 마음껏 서재를 이용하는 특권을 부여했다.

이용준은 장인의 배려로 긍구당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을 기회로 <매월당집>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빼낸다.

 

한편,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였던 김태준(1905~1949)은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같은 대학 법문학부 중국 문학과를 졸업하고 명륜학원과 경성제국대학에서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소설사조선 한문학사를 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에 바로 안동 출신의 이용준이 있었다. 19398월의 여름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 제자 이용준은 교무실로 따라와서 김태준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면서 뜻밖의 말을 털어놓는다. “우리 집안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고문서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는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한문학자였던 김태준은 이용준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 직접 확인해 보니,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용준 집안이 아닌 이용준의 처가댁인 광산 김씨의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가보였던 것이었다.

 

김태준은 이야기를 들은 후, 한남서림에 있는 문화재 수집가이자 연구가였던 간송 전형필을 찾아가서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알렸다. 한남서림은 백두용이 1905년에 종로구 관훈동에 세운 고서점이었는데, 전형필이 26세 때인 1932년에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운영을 맡긴 곳으로 평소 전형필은 이곳을 문화재의 수집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동안 훈민정음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었던 전형필은 흥분되어 곧바로 이용준에게 가자고 재촉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진본 여부와 매각 의사를 확인하고 있었던 김태준은 한성에 있는 이용준의 거처로 찾아가서 전형필의 구매 의사를 전하고 이용준과 함께 안동의 시골집으로 찾아갔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마주한 김태준이 자세히 살펴보니 표지와 맨 앞의 두 엽이 없었다. 이를 눈치챈 이용준이 거짓말로 둘러대기를 연산군 당시 언문 책 소지자를 엄벌해 처한다는 어명을 피하고자 첫머리 2장을 떼어버려 없는 상태로 전해져 왔다고 하였지만, 실은 이용준이 처가인 긍구당 소유임을 숨기기 위해 장서인 찍힌 부분을 뜯어낸 것이었다.

박헌영, 김상룡 등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지하조직으로서 인민전선부를 맡고 있었던 김태준은 전형필에게 받을 소개비를 경성 콤그룹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형필에게 제대로 구전을 받으려면 낙장 되어 있는 부분을 복원하여 원본처럼 만들어 놓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경성제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세종실록을 이용하여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자신에게 포섭되어 지하조직원이 된 이용준이 혹시라도 체포된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 계획을 밝히지 않았고, 이용준 역시 그 책이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온 것이 아니라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에서 훔쳐내어 앞 장 두 장을 떼어낸 것이라고 거짓말한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운 김태준은 남보다 탁월한 자신의 암기력을 활용하여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세종실록을 열람하여 세종 28(1446) 929일의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기사를 외워다가 안평대군의 서체를 잘 써서 서주(西洲)라는 호로 교남서화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서예가로 인정받기도 했던 이용준에게 쓰게 하였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낙장 된 부분의 내용 복원과 안평대군 글씨체의 연습을 끝내고, 훈민정음종이와 비슷한 누런색의 한지를 만들기 위하여 궁리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경성 콤그룹에 대한 검거 열풍이 불자 두 사람은 안동에 있는 이용준의 집으로 가서 한지를 쇠죽 솥에 넣고 삶는 방식으로 누런색이 나게 하는 데 성공하여 이용준이 안평대군 서체로 글씨를 써서 복원한 후 전형필에게 서신을 보내어 구매 의사를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옥살이까지 한 김태준을 직접 접촉해서 훈민정음을 사들이면 어떤 후환이 닥칠지 모를 위험이 있는 데다가, 김태준이 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이 사실을 발설할 경우 그동안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집해 두었던 각종 문화재급 수장품과 간송 문고까지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구매 의사를 타진한 편지를 불사른 후 한남서림의 관리인 이순황에게 연락하여 달라고 부탁하자 이순황은 자신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 망설임 없이 쾌히 응해주었다.

 

이순황의 연락을 받고 한남서림으로 찾아온 김태준을 만난 전형필은 훈민정음의 값을 얼마나 받을 것인지 묻자, 김태준은 쓸 돈을 고려하여 자기 생각으로 너무 과한 금액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1천 원을 불렀는데 현재의 화폐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전형필은 뜻밖에도 천태산인(김태준의 호) 그런 귀한 보물의 가치는 집 한 채가 아니라 열 채라도 부족하오.”라고 하면서 보자기 두 개를 건네주면서 그중에 천 원이 담긴 보자기를 김태준에게 내밀면서 이것은 훈민정음의 값이 아니라 이 귀한 책을 소개해 준 천태산인께 드리는 성의로 준비한 사례요.”라고 한 뒤 이어서 다른 보자기를 건네면서 이것은 훈민정음의 값으로 만 원을 담았습니다. 이렇게 값진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하면서 김태준이 제사한 값의 10배나 되는 거금을 건넸다.

 

소문은 들어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너무나 통이 큰 전형필에게 감탄한 김태준은 즉석에서 만 원을 책정하여 인편으로 내려보내니 정중히 책을 건네고 책값으로 과분하게 받았으니 다른 책도 몇 권 더 주면 좋겠다.”라는 편지를 써서 이순황을 안동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순황을 통해서 꿈에 그리던 훈민정음의 원본을 받아 내용을 확인해 보니 모두 333장으로서 제1부는 훈민정음 본문을 47면에 면마다 711자씩, 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52면에 면마다 813자씩이나 마지막 면은 3행이고, 3부는 정인지의 서문으로 36면에 한 자씩 내려 싣고서 그 끝에 정통 119월 상한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그 해가 바로 세종 28년으로 세종실록병인년(1446) 929일 자에 기록된 데로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셨다.’라는 내용과 일치한 명실상부한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일제의 감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인수했다. 소유주가 1천 원을 불렀으나 전형필은 10배인 1만 원을 지급했다.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책을 소개한 김태준은 따로 수고비 1천 원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해례본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해방되자 이 책의 존재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글 창제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간송 전형필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 중에서 최고의 보물로 여긴 훈민정음 해례본6.25 전쟁 중에 피난하면서도 품속에 넣고 다녔다고 하기도 하고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잘 때도 베개로 삼아 베고 자며 지켰다고 전한다.

 

한편 김태준은 1941년부터 옥고를 치르다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항일 무력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조선의용군이 주둔하던 연안(延安)으로 떠난다. 19454월 연안에 도착한 이후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걸어서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한 김태준은 12월 경성대학 초대 총장에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4611월 남조선노동당 문화부장에 임명됐고 남로당 간부로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들을 대상으로 특수문화 공작을 하다가 전북 남원에서 국군토벌대와 경찰에 체포되어 194911, 서울 수색 근처에서 총살되었고, 이용준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