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45]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의 수장
관리자 | 조회 140
[칼럼 45]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의 수장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최만리(崔萬理, ?∼1445)라는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세종 26년 2월 20일자 《세종실록》에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대표적 인물로 기록되어 불편한 관계로 기억된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의 핵심 관서이자 당시 뛰어난 학자들이 모인 집현전에서 약 25년을 근무해 실질적인 수장인 부제학에 올랐고 청백리에도 선정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성공적이었던 삶을 누리던 그가 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반대 상소를 올렸을까 시간을 거슬러 가본다.
세종 당시는 물론 조선 시대 전체를 지배한 기본적인 사상은 성리학이었고 그것의 기본적 외교 방침의 하나는 사대(事大)였기세 조선에서 사대라는 기본 원리를 부정할 수 있거나 그렇게 하려는 지식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최만리의 ‘갑자 상소’도 핵심적 논리는 바로 사대였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가 사대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최만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 시대의 조건에 충실했다. 그것은 그의 분명한 한계지만, 대부분 양반이 훈민정음 창제 후 오래도록 훈민정음을 천시하며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보편적 한계였음을 또렷이 보여 준다.
최만리의 공식적 생애는 태종 14년(1414) 생원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다. 4년 뒤 태종 18년 8월 태종이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충녕대군에게 양위하면서 즉위한 세종은 32년 동안 재위하면서 신생국 조선의 운명을 눈부시게 발전시켜놓았다.
이듬해 4월 새 국왕의 즉위를 경축하는 별시인 증광시가 시행되었을 때 3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최만리의 첫 관직은 조선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을 맡은 종부시(宗簿寺)의 직장(直長. 종7품)으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세종 2년(1420) 윤일월 기사에 나온다.
그러나 그 뒤 최만리의 거의 모든 경력은 집현전에서 이뤄졌다. 그는 세종 2년 3월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박사(정7품)로 임명되어 교리(정5품)ㆍ응교(정4품)ㆍ직제학(종3품)을 거쳐 18년 만에 실질적인 장관인 부제학에 올랐다(세종 20년. 1438). 세종은 집현전에 뛰어난 학자들을 모은 뒤 다른 관서로 옮기지 말고 거기서 오래 근무해 학문을 연마하라고 지시했는데, 최만리는 그런 방침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그의 다른 경력으로는 재직하고 있는 관원을 대상으로 치르는 중시(重試)에서 12명 중 2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급제했고, 세자의 서연에 참여하였으며 잠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기도 했지만, 세종 22년(1440) 곧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했을 뿐 아니라 그해 청백리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14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 대부분은 불교를 배척하고(6회) 세자(뒤의 문종)의 섭정을 보좌하는 관서인 첨사원 설치에 반대하는 내용(3회)이었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상소는 14번의 많지 않은 상소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가장 민감한 사안을 건드린 것이었다.
즉,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그날 그는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신석조ㆍ김문ㆍ정창손ㆍ하위지ㆍ송처검ㆍ조근 등 함께 근무하던 아래 관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글은 그해의 간지를 따라 ‘갑자 상소’로 불리는데, 최만리의 현실적 삶과 역사적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 된다.
널리 알 듯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 12월의 맨 마지막 날 실록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인 문자의 창제를 알리는 기록을 “이달에 주상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짧고 소략하게 밝혔다는 사실은 그것이 비밀스럽게 추진된 작업이었다는 방증으로 평가된다.
세종이 추진한 첫 훈민정음 관련 사업은 이듬해 2월 16일, 원 웅충이 엮은 운서인 [고금운회거요]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런 조처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의 이름이 웅변하듯, 훈민정음 창제의 일차적 목표가 현실과 맞지 않는 당시의 한자음을 바로잡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세종은 그 작업을 최항ㆍ박팽년ㆍ신숙주ㆍ이선로ㆍ이개ㆍ강희안 등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에게 맡겼다.
‘갑자 상소’는 이 지시가 있은 지 나흘 뒤 올라왔다. 최만리 등은 “언문의 제작은 지극히 신묘해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행함이 천고에 뛰어나지만,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의심되는 측면이 있어 뒤에 열거하오니 판단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는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문장으로 상소를 시작했다.
이어서 훈민정음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고 깎아내리면서 “지금, 이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에 지나지 않아 학문을 손상하고 정치에 이로움이 없으니 거듭 생각해도 옳지 않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맞서는 세종의 반응 또한 거칠었다.
“지금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너희가 운서를 아는가?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 개나 있는가?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는가?”
훈민정음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이 발언에는 언어학에 관련된 세종의 자부심이 넘친다.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해 상소에 참여한 사람들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다음 날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하루 만에 풀려난 최만리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세종 27년. 1445)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의 공식적 경력은 이것으로 마감되었다.
아무튼, 최만리가 “작은 잘못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간언”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는 유념할 만하다. 그가 보기에 훈민정음 창제는 사대라는 기본 원리에 저촉되는 것을 포함해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분명했겠지만, 그들의 상소는 신하들 대부분의 생각을 대변한 견해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던 최만리도 넘거나 깨닫지 못한 한계 너머를 본 유일한 사람은 위대한 임금 세종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라는 그의 위대한 업적은 훈민정음 창제 480년의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실험과 도전을 겪었지만, 결국 그가 처음 의도한 방향대로 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