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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nminjeongeum 2022 신년호 특집

훈민정음 칼럼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두 번째 조력자 광평대군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두 번째 조력자는 광평대군(廣平大君)이었을 것이다.  광평대군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무안군(撫安君) 방번(芳蕃)의 양자로 입양시켜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 세종 18년 1월 13일 12살의 나이에 결혼하여 궁 밖에 나가서 살았다. 세종 18년 2월 5일 광평대군의 제택(第宅)을 짓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듯이, 임금이 직접 지으라고 명하였지만 신하들의 비판을 받을 정도로 광평대군의 집의 규모는 굉장히 컸다고 하는데 사실은 임금이 자주 거처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별채를 지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마도‘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비밀의 장소로 이용하려는 세종의 의중이 담긴 건축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 이유는 세종이 정비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고, 후궁 5명과의 사이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세종 23년 되던 1441년 9월에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정의공주 집을 다녀온 임금이 유독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집을 이해 윤십일월 22일, 23일, 25일, 27일, 28일 등 6차례나 다녀오고, 또 이틀 뒤인 12월 1일 다녀왔다는 기록을 보아 보름 동안에 하루나 이틀 걸러서 일곱 차례나 다녀온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연이은 거둥은 세종실록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사를 통털어 전무후무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임금이 광평대군의 집에 거둥하기 전인 윤11월 16일에 “왕비가 광평대군 이여의 집으로 이어하였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왕비인 소헌왕후가 광평대군의 집으로 미리 거처를 옮겼다는 것인데, 이후 환궁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모두 7차례의 거둥에 대해서 실록은‘광평대군 이여의 집에 거둥하였다가 곧 돌아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임금이 광평대군의 집에 거둥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저 광평대군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이 거둥한 이유였다면 광평대군을 궁으로 불러들여서 만나면 될 것인데 왜 그를 부르지 않고, 동대문 밖에 있는 그의 집을 그토록 자주 거둥했겠는가?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주요 조력자 중 한 사람인 광평대군을 궁으로 불러들여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일을 의논한다면 반드시 새어나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임금이 친히 광평대군의 제택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17세에 불과한 광평대군의 어떤 점이 임금이 한 달 만에 7차례나 거둥하게 하였을까?  “나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효경》과 《소학》과 사서삼경을 다 통하고, 《문선》과 이태백·두보·구양수·소동파의 문집들을 두루 열람하였고, 더욱 《국어》와 《좌전》에 공부가 깊었으며, 음률과 산수에 이르기까지도 그 오묘한 이치를 다 알았을 뿐만 아니라 글을 잘 짓고 글씨의 필법도 절묘하였다.”  이 실록의 기록에서 표현한 대로 광평대군은 어릴 때부터 효경과 소학과 사서삼경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음률(音律)과 산수(算數)에도 오묘한 이치를 통달한 매우 영특한 세자였다. 그래서 임금의 신뢰와 총애를 받아 천체관측을 수행하는 천문대인 간의대(簡儀臺)를 만드는 일도 총괄했을 정도로 천문학과 역학에 대한 지식도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평대군의 학문과 재능은 훈민정음 창제에 절대적인 조력자의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임금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거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광평대군은 훈민정음 창제를 도우면서 건강을 해쳤던지 훈민정음이 창제된 다음 해인 세종 26년 12월 8일에 창진으로 안타깝게도 20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처음 그의 병이 위독할 때 임금이 밤을 새워 자지 않았고, 끝내 죽으매 종일토록 수라를 들지 않았다는 실록의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중요한 조력자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교육학박사 박 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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