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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nminjeongeum 2022 신년호 특집

훈민정음 칼럼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첫 번째 조력자 정의공주  세종은 재위 23년 되던 1441년부터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3년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수시로 신하들에게 눈병과 풍증 등 병이 심하다고 호소하면서 한 두 해 정도 쉬고 싶다고 말한다. 즉위 후 단 한 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던 조회와 경연 등마저도 거의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극구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 세자의 대리청정을 극렬히 반대하던 대신들에게 세종은 24년 되던 1442년 8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신하들의 고집을 꺾는다.  “경들은 자세하고 세밀한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갓 유자(儒者)의 정대(正大)한 말만 가지고 와서 아뢸 뿐이다.”  여기서 “자세하고 세밀한 뜻을 경들이 알지 못한다.”라고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말은 훈민정음 창제 때문에 세자의 대리청정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임금의 심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려서 23년 9월 6일 자 세종실록을 보자. “연창군 안맹담의 집으로 이어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궁밖에 나아가 며칠간 머물렀다는 것이다. 연창군 안맹담은 본관은 죽산(竹山)인데 1428년(세종 10) 세종의 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연창군에 봉해졌다. 그런데 왜 세종이 사위를 보기 위해 이어 했다고 기록하였을까? 이 기록은 안맹담을 보기 위한 이어가 아니라 출가외인이었던 정의공주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죽산 안씨 대동보》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대왕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는데, 변음토착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에게 풀어보라고 했으나 풀지 못했다. 그러자 공주에게 과제를 주었더니 풀어냈다. 임금이 크게 칭찬하고 공주에게 노비 수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위 기록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변음토착(變音吐着)’이라는 것이다. 그 뜻은 ‘말소리가 바뀔 때 토를 붙인다.’라는 것이다. 토(吐)는 보통 한문에 다는 토를 가리키지만, 이 글에서는 훈민정음 28자를 조합하여 글자를 만들 때 종성(終聲)의 받침글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심하여 대군들에게 풀어보라고 했으나 풀지 못하자 출가외인인 정의공주 집에 이어 하여 물어보니 공주가 정답을 아뢰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국어를 배울 때 받침글자가 가장 어렵게 느끼는 부분임을 고려한다면 훈민정음을 만들 때도 가장 고심한 부분이었을 터인데, 정의공주가 이를 풀어냈으니, 세종이 너무 기뻐하여 상으로 노비를 준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 자료는 1994년 이가원 교수가 처음 발견했지만, 일부 학자는 《죽산 안씨 대동보》의 기록은 정사가 아니므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라는 중대한 사업에 정의공주가 참여했다는 사실을 왕실의 족보에서 거짓으로 기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연관이 있는 구체적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매우 설득력이 강하다. 정의공주는 14세에 죽산 안씨 안맹담에게 시집갔는데, 총명하고 특히 역산에 뛰어났다. 또한, 불교에도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영특하고 학식이 풍부하여 세종이 사랑했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공주가 역산(曆算)에 뛰어났다는 것이다. 역산은 역학(易學)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천문학에 속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공주의 재능과 학문이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정의공주의 남편인 안맹담도 음률에 뛰어났다고 하니, 그도 임금과 공주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그 내막을 잘 아는 죽산 안씨 집안에서 그 사실을 ‘족보’에 감히 기록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백 명의 노비를 준 것은 비단 변음토착을 풀어낸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공주에게 주어 민간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가 그 결과를 세종께 보고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토속어인 이어(俚語)를 잘 알아야 그에 맞는 글자를 만들 수 있으므로 여항 사람들의 말이나 짐승들 소리, 그리고 온갖 의성어까지도 채취하여 그 높낮이와 강약, 청탁, 길고 짧음 등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 조사대상이 넓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을 하는 데 궁 밖으로 출가한 공주는 매우 적합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의공주가 훈민정음 창제의 조력자였다고 믿어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바로 ‘훈민정음’을 가장 환영하는 계층은 한문 생활이 불편했던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보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자의 필요성을 임금에게 간절하게 호소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조력자였을 것이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교육학박사 박 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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